
기술이 있다는 것은 AI 시대에도 가장 날카로운 무기입니다
얼마 전 인테리어 공사 현장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공정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AI가 빠르게 세상을 바꾸고 있지만, 숙련된 기술자의 손이 직접 닿아야만 완성되는 영역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타일을 정확하게 붙이고, 배선을 능숙하게 다루고, 도면을 보며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그 손끝의 기술을 보면서 좋은 기술은 잘 유지되고 잘 전해지면 그것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국가적 시스템으로 실현하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독일입니다. 1983년 설립된 시니어 전문가 서비스(Senior Experten Service, SES)는 은퇴한 전문가와 기술이 필요한 기업·기관을 연결하는 독일 최대 비영리 자원봉사 조직입니다. 현재 14,000명의 전문가가 등록되어 있으며, 설립 이후 170개국에서 7만 건 이상의 파견을 완료했습니다. 독일 연방정부와 경제 단체가 지원하며, 독일 대통령 슈타인마이어도 공개 지지를 밝혔습니다. 이 시스템의 구조와 효과를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은퇴 전문가를 사회 자원으로 연결하는 구조
SES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은퇴한 전문가의 경험과 기술을 그것이 필요한 곳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대기업, 공공기관, 연구소 등에서 수십 년을 일하고 은퇴한 전문가들이 SES에 자원봉사자로 등록합니다. 기계, 전자, 화학, 의료, 경영, 물류, 직업교육 등 50개 이상의 분야를 아우릅니다. 반대편에는 도움이 필요한 중소기업과 직업훈련 기관, 의료 시설, 공공기관이 있습니다. SES가 양쪽을 매칭하면 전문가가 해당 현장에 파견됩니다. 파견 기간은 통상 3주에서 6주이며 최대 6개월까지 가능합니다. 파견된 전문가는 무보수로 일합니다. 교통비와 숙박비 등 실비만 지원받고 금전적 보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수만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합니다. 인테리어 현장에서 목격했던 것처럼, 기술은 직접 전달될 때 가장 강력합니다. 자신이 평생 쌓아온 기술이 실제로 쓰이고 누군가의 현장을 바꾸는 경험이 은퇴 이후의 삶에 의미와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SES 파견의 약 3분의 1은 독일 국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이루어집니다.
기술 전수가 만들어내는 실질적인 효과
SES의 파견은 일회성 강의가 아닙니다. 전문가가 현장에 직접 들어가 문제를 진단하고, 함께 해결하고, 담당자를 교육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생산 공정에 문제가 있는 중소기업이라면 수십 년의 현장 경험을 가진 엔지니어가 직접 원인을 찾고 개선안을 실행합니다. 직업훈련 기관이라면 실무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가 커리큘럼을 현실에 맞게 재설계합니다. 이론이 아닌 실전의 언어로 전달되는 기술은 책이나 강의가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SES 공식 자료에 따르면 파견을 받은 기업과 기관의 만족도는 매우 높으며, 성과가 좋은 경우 후속 파견을 요청할 수 있어 지속적인 기술 전수가 이루어집니다. 중소기업은 고액의 컨설팅 비용 없이 현장 전문가의 실질적 도움을 받고, 은퇴 전문가는 자신의 기술이 사회에 기여한다는 보람을 얻습니다. 좋은 기술이 잘 전해지면 그것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없다는 말이 이 현장에서 매일 증명되고 있습니다.
한국 대기업 출신 전문가들에게도 이 길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떨까요. 대기업 정년퇴직자 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쌓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화학, IT 분야의 전문 기술이 퇴직과 함께 기업 밖으로 나오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은 아직 미흡합니다. 반면 국내 중소기업들은 만성적인 기술 인력 부족과 노하우 부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SES가 독일에서 해결한 바로 그 문제가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중소벤처기업부나 한국산업인력공단을 통해 유사한 시니어 기술 나눔 사업이 일부 운영되고 있지만, 독일 SES처럼 민간 주도의 자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구조로는 아직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은퇴 전문가를 복지 수혜자가 아니라 사회적 자원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기술은 퇴직과 함께 사라지면 안 됩니다
인테리어 현장에서 기술자의 손을 보며 느꼈던 그 생각이 이 글을 쓰게 된 출발점입니다. AI 시대에도 사람의 손과 경험이 만들어내는 기술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그 기술이 은퇴와 함께 사장되는 것은 개인의 손실이자 사회 전체의 낭비입니다. SES가 40년 넘게 증명한 것은 분명합니다. 은퇴는 기여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기업 정년 퇴직자의 기술이 중소기업의 문제를 해결하고, 좋은 기술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구조. 우리나라에도 이 시스템이 제대로 도입된다면, 기술은 사장되지 않고 사회를 더 강하게 만드는 자산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