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글로벌 시니어] 사라진 골목길의 ‘정’을 독일에서 찾다: 세대를 잇는 다세대 주택의 기적(개인화된 사회에서 잊혀가는 것들, 거실을 공유하는 현대판 확대 가족, 사회적 안전망이 된 공동체)

by 머니머니돈워리 2026. 5. 13.

 

사라진 골목길의 ‘정’을 독일에서 찾다: 세대를 잇는 다세대 주택의 기적

가끔 어릴 적 동네 풍경을 떠올려 보곤 합니다. 그때는 담벼락이 낮았고, 사람들의 마음도 그만큼 열려 있었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을 뵙면 당연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고, 김장철이면 집집마다 김치 통이 오갔습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어디선가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겼고, 갓 부쳐낸 부침개가 이웃집 초인종을 누르게 만들었죠. 서로의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시절, 우리는 혈연을 넘어선 거대한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1. 콩 한 줌에 담긴 그리운 온기: 개인화된 사회에서 잊혀가는 것들

 

얼마 전, 오랜만에 어머니 댁을 찾았다가 잊고 지냈던 그 풍경을 다시 마주했습니다. 아파트라는 삭막한 구조 속에서도 어머니는 옆집 할머니와 각별한 소통을 이어가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콩을 한 보따리 가져왔다며 "나눠 먹자"고 문을 두드리시는 옆집 할머니의 손에는 투박하지만 따뜻한 정이 들려 있었습니다. 어머니 역시 그 손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 집안을 뒤져 나눌 것을 찾으시더군요. 그 짧은 교류 속에서 두 어르신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이제는 '낯설고 특별한 일'이 되어버린 현실이 씁쓸하기도 합니다. 점점 개인화되고 고립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도어락 소리 뒤로 숨어버리곤 합니다. 특히 소통이 단절된 노인들의 고립과 독박 육아에 지친 젊은 세대의 고통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무거운 숙제가 되었습니다. 이 막막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저 멀리 유럽의 이웃 나라, 독일의 사례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2. 거실을 공유하는 현대판 확대 가족: 독일의 다세대 주택이란?

 

독일 역시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일찍이 겪었습니다. 핵가족화를 넘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며 발생한 세대 간 갈등과 소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이 내놓은 답은 바로 ‘다세대 주택(Mehrgenerationenhaus)’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한 건물에 사는 '주택'의 개념을 넘어, 마을 전체가 공유하는 '거대한 거실'을 만드는 프로젝트입니다.

독일의 다세대 주택은 1층의 공용 카페나 거실을 중심으로 운영됩니다. 이곳은 어머니와 옆집 할머니가 콩을 나누던 그 현관문 앞 복도를 물리적으로 확장해 놓은 공간과 같습니다. 이곳에서 노인들은 혼자 외롭게 식사하는 대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간식을 챙겨주고 동화책을 읽어줍니다.

가장 인상적인 활동은 ‘대리 조부모’ 프로그램입니다. 친손주는 아니지만, 노인들은 마을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돌봄의 공백을 메워줍니다. 젊은 부모들은 노인들의 노련한 육아 지혜를 빌리고, 그 대가로 노인들에게 디지털 기기 사용법을 가르쳐주거나 장보기를 도와줍니다. 과거 우리 골목길에서 김치와 부침개를 나누던 그 ‘정’이 독일에서는 시스템화된 공동체로 부활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택적 가족’이 되어줌으로써, 고립된 개인이 아닌 연결된 존재로서의 삶을 보장받습니다.

 

3. 사회적 안전망이 된 공동체: 우리가 다시 복원해야 할 가치

 

독일의 다세대 주택 모델이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세대 간의 교류는 단순히 감상적인 즐거움을 넘어, 한 국가의 생존을 지탱하는 강력한 사회적 안전망이 된다는 점입니다. 노인들은 아이들과 소통하며 삶의 활기를 얻고, 이는 자연스럽게 우울증 예방과 의료비 절감으로 이어집니다. 젊은 세대는 육아의 부담을 사회적으로 분담하며 경제 활동의 연속성을 확보합니다.

물론, 타인과의 밀접한 접촉이 사생활 침해로 느껴질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공동체 모델은 도전적인 과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옆집 할머니가 나눈 콩 한 줌의 대화처럼, 거창한 시스템 이전에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입니다. 독일의 사례는 우리가 잃어버린 골목길의 정서를 어떻게 현대적인 복지 모델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다시 맡고 싶은  ‘사람 사는 냄새’

대한민국도 이제 초고령 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아파트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웃에게 건네는 따뜻한 인사 한마디가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다세대 주택처럼, 우리도 물리적인 벽을 허물고 마음의 턱을 낮춘다면 사라졌던 ‘사람 사는 냄새’를 다시 맡을 수 있지 않을까요? 노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청년이 노인의 길잡이가 되는 풍경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우리의 미래여야 합니다.

봉지에 담긴 온기가 우리 사회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길 바라며, 독일의 지혜를 빌려 우리만의 새로운 공동체를 고민해 때입니다.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경제적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