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로등이 꺼진 그 길에서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오랜만에 손주를 보여드리러 아버지 어머니 집을 찾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요즘 걸음마를 시작한 손주를 데리고 운동 가시겠다는 아버지와 함께 아파트 단지 근처 둘레길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해가 짧아져서 어둑어둑한데 가로등이 켜지지 않은 겁니다. 먼저 걷던 제가 길에 턱이 있는지 모르고 발을 내딛다가 넘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을 맞았습니다. 다행히 젊은 저라 중심을 곧바로 잡았지만, 그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사시는 이 단지에서 어르신이 이런 상황을 맞이했다면 크게 다칠 수 있었겠다는 것. 그게 우리 아버지였다면이라는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야간 보행 중 낙상은 시니어에게 골절과 장기 입원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사고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 세계 시니어들이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찾아보던 중 오스트리아 빈(Wien)의 사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빈의 스마트 보행 인프라를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보행자를 먼저 알아보는 지능형 신호등
빈의 스마트 신호등 사업은 201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상 4미터 높이에 설치된 카메라가 신호등 반경 8미터 이내에 접근하는 보행자를 감지하고, 딥러닝 기반 소프트웨어가 1~2초 안에 횡단 의도를 판단해 자동으로 녹색 신호를 요청합니다. 버튼을 찾아 누르지 않아도 걸어오는 것만으로 신호가 바뀝니다. 2024년에는 TU 그라츠가 개발한 2세대 시스템이 빈 시내 4개 횡단보도에서 시범 운영을 마쳤습니다. 2세대 시스템은 카메라 해상도와 연산 능력이 향상되어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 휠체어 이용자, 유모차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녹색 신호 시간이 자동으로 연장됩니다. 손주와 함께 나온 아버지처럼 천천히 걷는 어르신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반대로 기다리던 보행자가 신호 전에 자리를 떠나면 불필요한 신호 변경을 하지 않아 교통 효율도 함께 높입니다. 어르신을 위한 기술이 도시 전체의 효율도 동시에 높이는 구조입니다. 빈 시청(MA33)과 TU 그라츠가 공동 개발한 이 시스템은 현재 빈 전역으로 확대 중입니다.
빈 전역 LED 스마트 조명이 만드는 야간 안전감
그날 제가 걸었던 어두운 둘레길 같은 문제를 빈은 스마트 LED 가로등으로 해결했습니다. 빈시는 벨기에 조명 전문 기업 슈레더(Schréder)와 협력해 빈 라운드(Vienna Round)라는 이름의 전용 LED 가로등을 개발하고 전역에 약 10만 개를 설치했습니다. 대형 모델 6만 6천 개와 소형 모델 3만 3천 개가 거리 특성에 맞게 배치되었습니다. 이 가로등은 단순히 밝기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빈 시청은 야간 보행자의 안전감을 높이는 것을 조명 정책의 핵심 목표로 삼았으며, 빛의 색온도와 배광 방향을 사람 중심으로 설계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기술연구소(AIT)가 수행한 UrbanLight 연구에서는 기존 가로등을 LED로 교체한 구간에서 보행자의 안전감과 쾌적감이 유의미하게 향상되었다는 결과가 확인되었습니다. 턱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는 어둠, 그 어둠을 제대로 된 조명 하나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빈은 이미 증명했습니다.
스마트시티 정책으로 통합된 빈의 보행 인프라
빈이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주목받는 이유는 이 모든 시스템이 스마트시티 빈(Smart City Wien) 전략 안에서 통합적으로 운영된다는 점입니다. 스마트 신호등, LED 가로등, 환경 센서, 교통 데이터 플랫폼이 서로 연결되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지능형 보행 환경으로 작동합니다. 향후 빈의 신호등에는 약 1만 개의 기상·환경 센서가 추가될 예정으로, 기온과 습도, 노면 결빙 여부까지 감지해 위험 상황에 사전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겨울철 빙판길에서 어르신의 낙상 위험이 가장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기능은 특히 중요합니다.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에 실시간 신호 정보를 전달하는 연계 시스템도 개발 중입니다. 기술이 도시 인프라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어르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보호받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도시가 먼저 알아봐 주는 것이 진짜 스마트시티입니다
그날 어두운 둘레길에서 넘어질 뻔했던 순간, 그것이 아버지였다면이라는 생각이 이 글을 쓰게 된 출발점입니다. 빈의 스마트 보행 인프라가 보여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르신이 도시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어르신에게 맞춰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신호가 바뀌고, 느리게 걸어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고, 밤길이 안전하게 밝혀지는 것. 이것은 기술의 과시가 아니라 사람을 향한 설계입니다.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의 가로등 하나가 제때 켜지는 것, 그 작은 것이 어르신의 안전과 생명에 직결됩니다. 도시가 먼저 알아봐 주는 것, 그것이 진짜 스마트시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