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안 치우냐고 하셨습니다
주말 아침 부모님 댁을 방문했는데 어머니만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어디 가셨냐고 여쭤보니 운동 나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요즘 아버지가 산과 둘레길을 돌아다니시면서 쓰레기를 줍고 다니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환경 관리하시는 분들이 따로 계시니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려도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안 치우냐고 하시면서 여전히 쓰레기를 줍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쁘게 지나치기 바쁜 그 길에서 아버지는 땅을 보고 계셨던 겁니다. 그 땅이 자식들과 다음 세대가 살아갈 곳임을 알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신 것입니다. 시니어 세대의 그 시선이야말로 환경을 지키는 데 가장 잘 맞는 눈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이 미국의 한 프로그램으로 이어졌습니다. 55세 이상의 시니어들이 환경 보호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연방 정부 프로그램, 시니어 환경 고용 프로그램(Senior Environmental Employment Program, SEE)입니다. 1984년 환경프로그램지원법(P.L. 98-313)으로 법제화된 이 프로그램은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운영하며, 시니어의 경험을 환경 프로젝트에 연결합니다. 지금부터 그 구조와 효과를 살펴보겠습니다.
55세 이상 전문 인력을 환경 현장에 연결하는 구조
SEE 프로그램은 EPA가 직접 참가자를 채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EPA는 노동부 장관이 지정한 5개의 전국 규모 비영리단체와 협력 협약을 맺고, 이 단체들이 참가자를 모집·선발·배치·관리합니다. 참가자들은 연방 공무원 신분이 아니지만 시간당 급여, 건강보험, 연방 공휴일 유급 처리, 병가와 휴가를 보장받습니다. 업무는 행정 지원부터 전문 기술직까지 폭넓습니다. 환경 생물학자, 화학 엔지니어, 지질학자, 커뮤니티 아웃리치 전문가, 기술 작가, 수질 조사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경력을 살려 활동합니다. 참가자가 기존 기관 직원의 일자리를 대체하거나 급여 수준을 낮추는 것을 법으로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어, 추가적인 전문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에 집중합니다. 워싱턴 DC를 비롯해 보스턴, 뉴욕, 애틀랜타,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 전국 주요 도시의 EPA 사무소에 배치됩니다. 경험과 나이가 자산이 되는 구조이며, 젊은 인력이 채우지 못하는 깊이 있는 전문성을 시니어들이 채웁니다.
EASI와 펜실베이니아 시니어환경단의 실제 현장
SEE 프로그램과 함께 주목할 것은 1991년 AARP와 EPA 파트너십으로 설립된 시니어 환경 참여 연합(Environmental Alliance for Senior Involvement, EASI)입니다. EASI는 지역 시니어들을 환경 자원봉사 프로젝트와 연결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성과가 펜실베이니아 시니어환경단(PaSEC)입니다. 1997년 10개 지점으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500명 이상의 시니어 자원봉사자가 훈련을 받고 매달 1,000개 지점에서 하천과 강의 수질을 모니터링하는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EPA와 주정부 기준에 맞는 엄격한 프로토콜로 수질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상이 감지되면 환경부에 직접 보고합니다. 아버지가 둘레길에서 쓰레기를 줍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이 시니어들은 강가에서 무릎을 꿇고 물속 생물을 관찰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1999년 유엔환경계획(UNEP)의 글로벌 500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2만 명 이상의 시니어 자원봉사자들이 환경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누적 4천만 시간 이상의 봉사 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도 이 모델을 도입했으며, 다른 여러 나라들도 도입 의향을 밝히고 있습니다.
시니어의 눈이 환경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자산입니다
SEE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은 단순한 보조 인력이 아닙니다. 수십 년의 현장 경험을 가진 전문가들이 환경 보호라는 사회적 과제에 직접 기여하는 것입니다. EPA 관계자들은 SEE 참가자들을 두고 우리 프로그램의 성공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시니어들은 이 땅이 다음 세대가 살아갈 곳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바쁜 등산객들이 그냥 지나치는 쓰레기를 줍는 이유와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적용되면 좋겠다
우리나라도 환경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은퇴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수십 년의 경험이 강과 공원, 해양 환경을 지키는 일에 연결될 수 있다면 어떨까요. SEE 프로그램은 은퇴가 기여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구체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안 치우냐고 하셨던 아버지의 그 말씀이, 사실은 환경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철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