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어머니께서 음악을 그렇게 깊이 느끼신다는 걸 오랫동안 몰랐습니다. 음악하는 아들로서 어머니의 재생목록을 챙겨드리면서도, 그저 심심풀이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이 곡 또 틀어줘"라고 말씀하시는 표정을 보는 순간, 음악이 어머니께 전혀 다른 무언가를 주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음악이 시니어 세대에게 주는 정서조절의 힘
어머니께서는 배운 적도 없으셨는데, 어릴 적 교회에서 이모가 풍금을 연주하는 걸 보시고 따라 치다가 어느새 반주를 맡으셨다고 합니다. 풍금은 건반악기의 일종으로, 발로 밟는 풀무를 이용해 공기를 불어넣어 소리를 내는 리드 오르간입니다. 요즘은 보기 드문 악기지만, 그 시절 교회에서는 예배 반주의 핵심 악기였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재생목록을 제가 채워드리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아들 곡을 반복해서 들으시면서 듣고 싶은 곡이 생기면 직접 말씀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 과정이 단순한 음악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 두 분이 TV에서 가요 무대를 함께 보실 때, 오래된 노래 한 곡이 흘러나오면 서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다가 어느 순간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추억 공유를 넘어서 감정이 교류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음악이 가진 정서조절(Emotional Regulation) 기능을 실감했습니다. 정서조절이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인식하고 조절하는 능력으로, 심리학에서는 정신 건강의 핵심 요소로 봅니다.
더 인상적인 건 세대 간 소통이었습니다. 요즘 트롯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면서, 부모님 세대가 즐겨 듣던 음악이 젊은 세대에게도 자연스럽게 닿고 있습니다. 음악이 세대 간 장벽을 허무는 매개체가 되는 셈입니다. 실제로 음악 감상이 고령자의 우울감 감소와 삶의 만족도 향상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음악이 시니어 세대에게 주는 효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과거 기억과 연결되는 회상 효과로 감정적 안정감 제공
- 타인과 감정을 나누는 사회적 연결고리 형성
- 세대를 넘어 공통의 언어로 소통하는 매개 역할
- 반복 청취를 통한 정서 안정 및 일상의 리듬 형성
글쓰기가 시니어에게 선물하는 회고록
솔직히 저는 장인어른께서 수첩에 적어두신 문장을 처음 봤을 때 가볍게 넘겼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단 한 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문장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지나온 삶 전체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글쓰기에서 회고록(Memoir)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회고록이란 자신의 삶에서 의미 있었던 경험이나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작업으로, 단순한 일기와 달리 특정 주제나 시기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형식입니다.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수첩에 한 줄 적는 것도 회고록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타이핑이 아니라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가는 필기의 과정이 생각을 정리하는 속도를 늦춰주고, 그 사이에 기억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로 자기 성찰
심리학에서는 이를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라고 부릅니다. 표현적 글쓰기란 억눌린 감정이나 경험을 글로 표출함으로써 심리적 부담을 낮추는 치료적 글쓰기 방법입니다. 1980년대 심리학자 제임스 페네베이커(James Pennebaker)가 연구를 통해 그 효과를 입증한 이후 현재까지도 임상 현장에서 활발히 활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표현적 글쓰기가 면역 기능 향상과 심리적 회복탄력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장인어른의 그 한 줄을 보면서 저는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하나는 글쓰기가 지난 삶에 대한 자기 성찰을 이끌어낸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성찰이 앞으로 남은 삶에 대한 방향 설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로 연결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소근육 활동을 넘어서 글쓰기가 가진 진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아래 문장 중 하나로 시작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다."
-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은 이것이었다."
-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한 가지는 무엇인가."
거창한 문학 작품을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음악은 감정을 건드리고, 글쓰기는 그 감정을 말로 꺼내줍니다. 어머니를 보면서, 그리고 장인어른의 수첩 한 줄을 보면서 저는 이 두 가지가 시니어 세대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닌 삶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이 조용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조용함을 음악과 글로 채워가는 분들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삶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깊어진다는 걸 느낍니다. 주변의 시니어 세대 부모님이 계신다면,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틀어드리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