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 1층이 의원이 됩니다. 일본 UR단지 재생 사업이 바꾸는 노후의 풍경
우리 집에서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곳에 종합병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국가 유공자 지정 병원이라 월남전에 참전하신 아버지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입니다. 이 경험을 하면서 시니어 세대에게 거주지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병원의 근접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공기 좋고 조용한 곳이라도 응급 상황이 언제 생길지 모르는 시니어 분들에게 병원이 멀다는 것은 큰 리스크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병원 근처에 모여 살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주변 나라의 사례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UR도시기구가 추진하는 단지 재생 사업입니다. UR은 Urban Renaissance, 즉 도시 재생의 약자이며, UR도시기구는 일본 국토교통성 산하의 독립 행정법인으로 전국 공공임대주택을 건설·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이 기관이 낡은 공공임대 단지의 1층을 의료·돌봄 허브로 바꾸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미 어르신들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필요한 것을 채워 넣는 방식입니다. 지금부터 이 사업의 구조와 실제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1층을 지역 의료복지 거점으로 바꾸다
UR도시기구 단지 재생 사업의 공식 명칭은 지역 의료복지 거점화(地域医療福祉拠点化)입니다. 핵심은 단지 내 빈 공간, 특히 1층의 비어있는 상가나 주거 공간을 의료·복지 서비스 거점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오사카부 야와타시 오토코야마 단지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철골조 4층 건물로 재생된 이 시설의 1층에는 지역포괄케어 추진 거점이 들어섰습니다. 다목적 홀, 주민들이 편하게 들를 수 있는 교류 카페, 의료·복지 상담실, 정기 방문 및 긴급 대응형 방문 개호·간호 사업소가 함께 운영됩니다. 2층에는 고령자 안심 서포트 하우스, 3~4층에는 지역 밀착형 특별 양호 노인 홈이 배치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 한 번이면 집에서 의사를 만나고, 복지 상담을 받고, 요양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단지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지역 전체의 돌봄 인프라가 됩니다.
빈집과 고령화,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다
UR 단지 재생 사업이 주목받는 이유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단지 내 빈집 문제입니다. 1960~70년대 대거 공급된 UR 임차주택은 현재 전국에 약 71만 호가 운영 중이며, 입주 세대 중 65세 이상 고령자가 있는 세대 비율이 39%에 달합니다. 고령화로 사망하거나 요양시설로 이전하는 입주자가 늘면서 빈 세대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공간을 의료·복지 시설로 전환하면 유휴 공간을 사회적으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의료 기관에 저렴한 입지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고령 주민의 의료 접근성 문제입니다. 모두가 병원 근처에 살 수 없다는 현실, 바로 그 문제를 이 사업이 해결합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했던 상황이, 단지 1층에 클리닉과 상담 창구가 생기면서 해소됩니다. UR도시기구는 2014년부터 이 사업을 본격화하여 지자체와 연계해 전국 단지에서 지역 의료복지 거점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사는 단지로의 전환
UR 단지 재생 사업은 고령자 돌봄 시설 유치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동시에 젊은 세대와 자녀 양육 가구를 단지 안으로 끌어들여 세대 혼합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장기 목표입니다. UR도시기구는 자녀 양육 가구를 위한 보육 시설 유치, 젊은 세대를 위한 임대료 할인 제도, 대학과의 연계 프로그램 등을 병행합니다. 고령자와 젊은 가족이 같은 단지 안에서 얼굴을 알고 지내는 환경이 조성되면, 고령자의 고립 문제와 젊은 세대의 육아 부담을 함께 줄이는 효과가 생깁니다. 실제로 UR 단지 내 커뮤니티 카페를 중심으로 세대 간 교류가 활발해진 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낡고 고령화된 단지가 다양한 세대가 어울리는 활기 있는 마을로 다시 태어나는 것, 그것이 이 사업이 지향하는 최종 그림입니다.
허물지 않고 바꾼다, 도시 재생의 새로운 방향
걸어서 닿는 거리에 병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안심인지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 안심을 모든 시니어가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UR도시기구 단지 재생 사업은 바로 그 안심을 구조로 만든 시도입니다. 병원이 없는 곳에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에 병원과 돌봄 서비스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1980~90년대에 지어진 공공임대주택 단지들이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빈 상가와 유휴 공간이 늘어나는 이 단지들에 의료·돌봄 서비스를 유치하는 일본의 방식은 충분히 배울 만합니다. 어르신들이 살아온 공간에서 마지막까지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는 것, 그것이 초고령 사회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현실적인 과제입니다.